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1) 10. 임진강에 산 사람, 미수 허목 (2) 허목과 친구들, 강이 채워지던 시절
수정 : 2021-10-27 07:05:46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1)
10. 임진강에 산 사람, 미수 허목
(2) 허목과 친구들, 강이 채워지던 시절
▲ 괘암/자장리 임진강변에 있는 바위. 바위에 미수가 쓴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있다.
미수 허목은 조선 중기 양란을 거치며 당쟁의 한 복판을 산 사람이다. 왜란이 끝나지 않은 1595년에 태어났고, 42세에 병자호란을 맞는다. 어린 시절은 지방 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곳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런 중 평생의 친구 조경을 만났고, 말년의 정구를 찾아가 공부한다. 병자호란이후 10년은 상주, 의령, 창원 등 남쪽 지방을 전전했다. 52세가 돼서 향리인 연천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십대 후반 나이에 벼슬을 시작한다. 허목은 영남의 남인세력을 수도권으로 끌어올린 근기남인의 영수로 평가된다. 연천에 터를 두었지만 젊은 시절을 주로 영남에서 보냈던 삶의 궤적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허목이 오면서 연천은 당시 비판적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거점이 된다. 이들은 교류하는 틈틈이 임진강에 나와 야회를 열었다. 강 곳곳을 누볐고, 허목은 이를 꼼꼼히 기록한다. 이들의 족적으로 임진강이 꽉 채워지던 시절이다.
▲ 허목이 친구들과 뱃놀이를 즐기던 미강. 아미산 일대 임진강을 미강이라 한다.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내려가서 괘암에 이르렀다. 그 아래로 많은 바위와 긴 강과 흰 모래가 펼쳐지고 이따금 높은 절벽이 강 속에 우뚝 서 있는데, 괘암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이하고 빼어나서 깎아 세워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허목. 「괘암제명기」 중에서)”
괘암에는 목은 이색의 글씨가 새겨 있었다. 3백년이 지나면서 글씨가 지워진 된 바위에 허목은 ‘괘암 미수서’란 글씨를 새겨 옛일을 되살린다. 허목의 글씨는 지금도 흐릿하게 남아있다. 괘암은 임진강 고랑포 건너편에 있다. 고랑포는 이색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고, 뒤에 그를 배향한 임강서원이 있던 곳이다.
“객과 더불어 미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강을 낀 절벽 아래 위는 모두 짙은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갈대로 뒤덮였고, 물결은 아득하고 물가는 매우 먼데 기러기가 날아서 모여들었다. 이에 각각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면서 취하도록 마시고 즐거워하였다.(허목. 「미강범주기」 중에서)”
미강은 아미산을 낀 마전의 임진강을 말한다. 고려왕의 사당인 숭의전이 있는 앙암에서 오강, 호구협에 이르는 곳이다. 서울에서 허목의 집을 찾아오는 이들은 주로 미강을 건넜다. 허목은 벗들과 함께 여러 차례 이곳을 찾는데 뒤에 허목을 배향한 서원이 이곳에 세워진다. 그 이름이 또한 미강서원이다. 터를 알리는 비석이 지금도 미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함께 큰 강에 이르러 강가 주인을 따라 웅연의 신비스러운 석문 글씨를 보았다. 그런 다음 배를 띄우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 망저탄을 지나 횡산으로 올라가서 장경대에서 놀았다. 이때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졌는데, 모래는 희고 물은 아득하며 연기 낀 경치는 끝이 없었다.(허목. 「정미년 배를 띄우고 유람한 기」 중에서)”
▲ 허목은 임진강 곳곳을 기록한다. 황산기도 그 중 하나다. 군남댐 건설 전의 횡산리 모습
웅연석문, 횡산, 장경대는 무술년 주행의 도착지 징파나루 상류에 있다. 유람을 안내한 강가 주인은 이진무란 이다. 웅연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허목과 사돈 간이다. 함께 한 사람은 한산의 송석우와 윤휴.
허목은 수시로 임진강을 찾았다. 안개 낀 강에서 낚시를 하거나, 눈을 맞으며 장경대 석벽을 지나고, 웅연의 기이한 글씨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남긴 기록들이 임진강 곳곳의 풍치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웅연범주기>, <관음사무설기>, <징파도기>, <앙암기>, <감악산기>, <웅연석문기>, <횡산기>, <이포별업기> 등에는 지금도 살아있는 임진강 모습이 담겨있다.
▲ 미강서원터. 허목을 배향한 서원이 있던 곳이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터를 알리는 비석이 임진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허목은 임진강에 대해 특별할 만큼 많은 기록을 남겼다. 후예들이 미강, 웅연 등을 찾아 그 길을 되짚으면서 역사의 풍경은 더 풍성해졌다. 묘한 것은 허목의 발길이 임진강 아래쪽 파산이나 임진에는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곳은 율곡과 우계의 터다. 율곡, 우계와 겹쳐지지 않는 그의 족적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서 그이들과는 다른 길을 간 남인학자 허목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1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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